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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전쟁의 신을 불러냈다. 독일제국은 빠른 기동력, 라디오 기술을 이용한 전차기술, 초인적인 보병의 능력은 전쟁의 초반을 완전히 혼란으로 빠뜨렸다.

독일은 영토를 잃은 문제

   베르샤유조약의 여파로 엄청난 배상금은 차치하고라도 독일 영토의 동쪽은 폴란드와 체코에 양도하고, 라인란트 지역은 벨기에와 프랑스에 대한 비무장지대의 역할로 양도를 했다. 

   다른 나라들도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국민들 내부에 있었다. 아우토반 만들기나 하는 식으로 일자리를 창출했다. 

   1935년 의무병역제도를 시행하고, 30000명을 동원하여 라인란트 지역을 회복하였다. 1938년엔 오스트리아로 진격을 했다. 

   연합국들은 강제점령이라 보지 않고 오스트리와와의 통합을 바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 사용하는 수데테란트 지방의 합병을 승인하고 불가침을 지지하는 뮌헨협정을 이끌었다. 영국수상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이루었다. 

   서방국가의 대응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진격하고 있었다. 즉 독일 영토의 확장. 결국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소련은 1차 세계대전으로 잃은 소련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폴란드의 침공과 영국, 프랑스의 선전포고

   프랑스의 마지노선에 있는 방어책은 연합군이 선제공격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다른 장군들은 예전 1차 대전과 같은 방법으로 북프랑스를 공격하라고 했지만, 프로이센 출신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성공계획을 제시했다. 반면 히틀러는 장기적으로 갈 수 있는 프랑스 공격에 앞서 자원확보를 위해 북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침공을 계획했다. 영국군이 노르웨이에 상륙하여 저지를 해보려했으나, 기갑부대와 공군력으로 순식간에 전세는 독일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5][실화] 2차 세계대전 폴란드군 : 베스테르플라쯔(1939 Battle of Westerplatte)

Director: Pawel Chochlew Writer: Pawel Chochlew Stars: Michal Zebrowski, Robert Zoledziewski, Jan Englert 1939 Battle of Westerplatte (2013) - IMDb Directed by Pawel Chochlew. With Michal Zeb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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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와 네델란드 침공

   독일은 벨기에와 네델란드를 참공한다. 우선 공수부대가 다리를 확보하였고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었다. 영국침공을 위한 항구확보를 목적으로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델란드를 침공하고 있다는 소식은 연합군의 최정예를 벨기에 상륙을 하게 만들었다. 

아르덴으로의 독일군 진격

   아르덴으로 들어간 군인들이 벨기에에 있는 영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전략이었다. 시간, 속도, 대담함(time, speed, daring)은 독일군의 핵심전략이었다. 

   이를 설계한 사람은 하인리히 구데리안 장군이었고, 신기술과 독일군의 전통적인 전술을 결합하여 압도적인 전력으로 전격전을 지시하였다. 그는 공군을 공중포병처럼 사용, 라디오 기술을 전차, 트럭, 자주포에 활용하는 등 신기술을 자유자제로 활용하였다.

   퍼버틴이라는 피로회복제가 3일 밤낮을 달리게 했었다. 

됭케르크 철수작전 

   벨기에, 네델란드에 원정군인 영국군은 칼레에서 영국해협을 건너서 후퇴를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하지만 칼레도 빼앗겼다. 하지만 칼레에서의 영국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 시간을 벌었고, 뒹케르크에서의 방어선이 완성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 갑자기 진격중지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장군들이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도 마음대로 진격을 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치 인사들도 도배된 공군에게 승전의 영광을 주어야 한다고 육군의 진격을 정지시킨 헤르만 괴링의 의견 때문이었다. 육군은 병력손실을 발생시키니 그런 위험이 없는 공군이 담당할 수 있도록 히틀러를 설득한 것이다. 

   하지만 구름이  많아썬 대다가 독일군이 정유소를 폭파하는 바람에 4.5Km에 달하는 visibility가 문제가 되면서 슈투카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공군의 스핏파이어와 헤리케인이 출력하면서 급강하폭격기를 격추하기 시작했다. 

   45000명을 예상했던 구조가 340,000만명을 구조에 성공했다. 

프랑스 정부의 파리 남부로의 철수

   프랑스인들은 투르, 보르도로 피신했다. 레노 총리는 사임을 하고 페탱 원수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비시정권을 수립되었다. 

나의 해석

   전격전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렬로 서서 사격을 하고 전진을 하고 또 사격을 하고 전진하고 기마병이 와서 우회로 기습공격을 하는 그런 전쟁의 모습에서 ...

   3박 4일을 쉬지 않고 달리면서, 마치 KTX와 같은 속도로 돌격하는 전투병과 탱크를 보면 기갑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선전포고도 없이 혹은 형식적으로 하고, 기갑사단이 그간 다닐 수 없는 길을 뚫고 습격을 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초 징키스칸의 부대가 2주는 넘게 걸릴 것이라는 거리를 단 1-2일 만에 돌격해서 주파를 해버리는 순간 유럽의 병사들이 기겁을 했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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