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쟁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라이언일병구하기, 밴드오브브라더스, 퍼시픽 까지 이어지는 실사와 비슷한 영화에서 감동을 받아 이리 저리 찾아보다 보니 전쟁영화에 빠져들었고, 다큐까지 접하다 보니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궁금증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전쟁영화를 보면 피아간의 두뇌플레이와 전략 그리고 액션들이 너무나 재미가 있다. 하지만 그 전쟁에 실제로 있는 참여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장이며, 특히나 실화의 경우에는 엄숙한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스토리를 접하다 보면 사실일까 싶은 내용들도 꽤 많이 있었다.
어찌보면 대학원 수업시간에 미학의 역사를 접하면서 내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더욱 현실과 멀리 두지 못하게 되었는데... 미학에서 다루었던 자포니즘이나 시누아즈리가 결과적으로 동양의 문명이 서양에 전달되는 과정이었고 우리가 거장이라고 다루었던 사람들도 이러한 문화를 흠모하고 모작을 그리다가 스스로의 화풍을 만들었다는 것이 가벼이 볼 사안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풍들은 결국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그 시대상은 묘하게도 역사공부에 대한 불을 당겨 지금은 역사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사람이 되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은 현재와도 맥락이 연결되어 가벼이 볼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그런 부분들간의 역사적 추론들이 약간씩 가능해졌다. 어찌보면 그리도 중요한 사안들이 과거 식민역사학자 혹은 이를 계승한 보수적 역사학자들이 생략한 부분들도 있었다.
내가 다루게될 역사는 그냥 가벼운 소설일수도 어쩌면 사실에 입각한 추론일수도 있지만, 그저 그럴 수 있을 듯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하나 카테고리를 개설하였다.
없던 사실도 역사로 둔갑시키는 기술을 가진 민족도 있는데 그 정도 추론이나 우리 역사를 올바로 아는 데에 힘을 보탤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기쁜일이 없지 않을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임진왜란이 한일병탄과 현재진행형인 토착왜구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왜구는 한반도에 농경민들이 살면서 쌓여진 부가 섬나라 일본에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왜구에 대한 이야기는 동아시아 역사를 살펴보면 지겹게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왜구들이 가진 것이 없었을 때는 열심히 한반도, 중국, 동남아시아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고 털어갔는데, 이 왜구들이 통합되고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하면서 일은 시작된다.
우리가 왜와 교역을 할때엔 왜의 상황도 잘 알았고, 그러기에 상호간의 첩자들도 뿌려지고 해서 견제도 하고 했었다. 세종때의 대마도 정벌은 이러한 왜구들이 얼마나 활개를 쳤었는지에 대한 증빙이기도 할 것이다. 한동안 왜가 전국시대에 들어설때는 수십여년 동안 통신사도 일본에 가지를 않았다.
연은분리법의 등장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 이기도 한데, 임진왜란 30년전 1503년, 함경도 단천 탄광에서 일하던 양인 김감불과 장예원 노비 김검동이 연은분리법을 세계 최초로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은을 분리해내는 연은분리법을 개발하였다.
조선의 은 산출량이 늘어가자 조정은 명나라의 화폐로도 쓰이는 은의 생산이 은조공량의 증가를 야기할 것을 우려해서 은광을 폐쇄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남아 돌던 조선의 은기술자들이 일본의 지방정부와 손을 잡고 일본의 은광에서 은광석을 가공하고, 또 제련까지 해는 식으로 까지 왜은이 역수입되면서 일본의 은무역의 규모는 점차 거대하게 성장한다. 그 중 일본 시마네현의 이와미은광(石見銀山)은 일본을 세계 2위의 생산국으로 만들어 주었다.
포르투칼 상인부터의 조총입수
이런 와중에 섬나라 왜에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 1543년 폭풍우에 표류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규슈 남쪽 다네가시마에 불시착을 한다. 그리고는 운좋게도 살아남아 다네가시마 영주에게 조총을 팔게 된다. 당시 조총의 가격은 당시 2억엔 정도의 은을 지불하고 조총을 두자루 구입을 해서 대장장이들이 복제를 하는 방식으로 보급이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내란(사실 한나라가 아니었으니 내란이라고 하는 말이 적절한지는 고민)으로 시달리던 일본내의 군인세력들간의 경쟁이 더욱 과열화 되고 그때까지 냉병기 위주의 아시아권 병기들이 급속히 열병기 시대로 돌입하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그리고 교역을 통해서 습득된 지식은 복제를 통해서 일본내 판매나 혹은 스스로 사용하여 무장을 하는 식으로 일본 전체를 조총부대를 이용한 전투에 몰입하게 만들어진다.
임진왜란 그리고 이어진 정유재란
한편 은광으로 쌓여진 부는 결과적으로 일본 전국시대에 전쟁자금으로 쓰이게 되어 도요토미히데요시도 이 은으로 축적한 부를 기반으로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즉 조선으로 부터 유래된 은광기술로 총을 사서 조선정복전쟁을 벌인 것이다. 한양만 정복하면 모든 일이 끝날 줄 알았던 히데요시의 군대가 한양에 다다랐을 때 한양은 빈집이었다. 의주까지 피란을 간 선조를 잡기 전에 이순신 장군으로 인한 보급로의 차단, 의병의 발발로 인한 후방의 불안정은 이 전쟁을 승전을 이끌지 못했다. 어이 없게도 조선의 문화를 이해 못하고 실패로 끝나자, 조선인들의 인심을 얻겠다는 임진왜란의 전략을 조선으로부터 실익을 취하겠다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이로 인해 발발한 것이 정유재란이다. 시작부터 칠천량 해전으로 인하여 조선수군이 사라진 틈을 타 일본은 포르투칼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조선을 닥치는 대로 약탈을 행한다. 우수한 조선도공들을 납치하고 쓸만한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면서 다시 1차적인 전쟁의 보상을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