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중세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약탈 혹은 점령지 약탈은 그야말로 사회 통념적인 일반문화였다. 그러다보니 안가져가면 이상할 지경...  또한, 민란을 강제진압한 진압군 출신의 대통령도 있었던 우리나라... 

나폴레옹의 시위 진압작전

그리고 동시대는 아니지만...  재현된 광주

 

나폴레옹시대의 프랑스가 자행한 문화재 약탈

   하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왕당파를 지지하기 위한 영국해군의 툴롱이라는 요새를 봉쇄해버린 것은 충격 그자체였다.

 

누가 누굴 봉쇄한 것일까 - 나폴레옹과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

최근 미국이 북한에 대한 해상 봉쇄에 나서겠다고 선언했지요. 해상 봉쇄란 사실 '빨갱이를 때려잡자'라는 구호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령 유니세프에서 북한 아기들을 위해서 보내주는 백신 등 의약품도..

nasica1.tistory.com

   나폴레옹 역시 유럽이 당시 친인천관계로 다 연결되어 있는 거대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에 반하여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왕당파를 척결하는 쪽에 자코뱅(공화당편)편에 서 있어서 이익을 취한 장교일 뿐이다. 

   그리고는 황제가 되었다. 공화정에 반대가 되는 왕정을 넘어선 황제정을 한 것이니 자코뱅의 눈치를 안볼수가 없었던 것이다... 

 

약탈문화재 > 독일개관 | 베를린리포트

커뮤니티 새아리 유학마당 독어마당 [독일개관]독일에 관련된 유용한 정보를 이곳에 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게시판은 독일관련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기 위한 곳입니다. 그러니 1회용도의 글(구인,질문 등)은 정보의 가치가 없으므로 이곳에 올리시면 안됩니다. 문화예술 약탈문화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4,822회 작성일 0

berlinreport.com

   결국 주변국을 정복해서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완성? 했다고 보는 나폴레옹은 문화재를 충분히 약탈해 간다. 모나리자(이건 구입)외 그 주변에 주로 약탈 문화재를 루브르에 깔아놓았다고 한다. 

일본의 한반도 문화재 약탈

   결국 서양의 식민지 쟁탈전을 따라한(물론 그저 따라했다고 용서되는 건 아니다. 강도질을 따라했다고 무죄가 되던가?) 일본은 동아시아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을 포함)을 통해서 또 한일병탄(한일합방 및 대한제국 후반기...)를 통틀어서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문화재를 약탈했다. 

 

최고정권이 된 진압군 총사령관

   황제가된 나폴레옹과 대통령이 된 박정희, 전두환 .... 다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강뉴부대는 한국전쟁때 한국에 파병된 에티오피아의 친위대 병력의 또 따른 애칭이며 5만명의 정규군 중 6000여명을 파병했다. 실제 뜻은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혹은 '적을 초전에 격파하다'라는 뜻으로 파견을 명한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명명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강뉴부대’의 4가지 기록

수 천km떨어진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온 ‘강뉴부대’의 숨겨진 기록을 소개한다.

www.insight.co.kr

 

한국전쟁 253전 253승 불패신화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고맙습니다... | "우리 에티오피아가 항상 추구하고 있는 세계평화를 위한 집단아보라는 이 신성한 세계정책을 실현하고 보호하기위해 그대들은 오늘 장도에 오르는 것이다. 가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이길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때까지 싸워라." -하일레 셀라시에 에티오피아 황제의훈시- 6.25 전쟁은 쉽게 잊힐 수 없는 우

brunch.co.kr

당시 한국전쟁때 우리나라는 UN의 수많은 국가가 참전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실제 전투병을 참전한 나라는 미국, 영국, 호주, 네델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그리고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총16개국이 전부였다. 

   강뉴부대의 배치지역은 연천, 화천, 철원 지역등 미군이 고전하는 지역들이었다. 

   아직도 군사적 요충지로서 지도에 잘 표시되지 않는 격전지이다.

 

[끝나지 않은 전쟁]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어려운 형편에도 참전 즉각 결정

“어느 나라가 침략군에 침략당한다면 다른 나라가 도와줘야 한다.”1950년 7월 중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으로부터 한국군을 지원해 달라

news.kmib.co.kr

그들을 기억하며

 

반응형
728x90
반응형

스와스티카의 운명

   나치의 깃발이 그전까지는 평화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나치는 경례의 방식도 모솔리니에게서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나치는 상징도 다른 억지 연구를 통해서 차용을 한다. 독일 고고학자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19세기말 고대 트로이 유적지에서 꺽인 십자 모양을 발견하고 독일의 도자기에서 발견한 모양과 유사함을 발견하여 곧바로 연결 독일의 고도선조의 종교문양으로 추측했고, 이것이 국수주의자들에게 많이 사용이 되면서 순수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채택이 된다. 

   그로 인하여 독일인들에게 아리아인의 정체성과 독일 국수주의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정착이 되고, 일반 서민들에게 알리기 쉽다는 편리성 때문에 나치의 상징으로 정착한다.

본래의 의미

   본래 스와스트카 상징은 인도에서는 행운과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되었고. 흰두교, 불교, 자이나교, 오딘교 등에서 신성한 상징으로 취급되었었다. 

   또한, 기독문화 탄생 이전 유물에서 고대 유럽의 역사에도 존재한다. 

이것이 악의 상징인 나치의 상징으로 바뀌는 건 실로 놀라운 역사의 반전이다.

   태극기가 보수당을 상징하고, 분홍빛이 특정당의 상징으로 정착되는 과정도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의 최종디자인

   이러한 스와스티카의 심볼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나는 수 없는 시도 끝에 최종 문양을 완성했다. 빨간색 배경에 하얀색 원 중앙에 검정색 스와스티카가 있는 것이다. 오랜 시도 끝에, 깃발의 크기와 흰색 원의 크기 사이의 비율 뿐만 아니라, 스와스티카의 모양과 두께도 최종으로 결정했다"라고 표현되었던 것처럼 히틀러가 완성했다. 

 

스와스티카의 역사 | The Holocaust Encyclopedia

스와스티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깃발의 디자인으로 사용하기전 최소한 5,000년전에 사용되었다. 스와스티카라는 단어의 어원은 범어로 "행운" 또는 "복지"를 의미하는 스바스티카에서 온것이다. 주된 문양(꺾어진 십자가)은 신석기 시대 유라시아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하늘을 통과하는 태양의 이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및 오딘교에서는 신성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또한 인도나 인

encyclopedia.ushmm.org

 

반응형
728x90
반응형
 

나무위키:프로젝트/전쟁사 - 나무위키

객관성 있는 정보를 기재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전열함들은 목재였으므로 화재에 취약한것을 노린 발사방법. 각종 토막글들이나 보충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문서는 이쪽으로 옮겨주시기 바랍니다.

namu.wiki


추가바람3.1.2. 기원후[편집]3.1.2.1. 기원후~9세기[편집]


추가바람

3.1.2.2. 10세기~14세기[편집]


추가바람

3.1.2.3. 15세기~제1차 세계대전 이전[편집]

3.1.2.4. 제1차 세계대전[편집]

3.1.2.5. 제2차 세계대전[편집]

3.1.2.6. 현대전[편집]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