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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탈환

   D-day이후 연합군은 어렵게, 캉을 탈환하고 파리탈환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또한 독일군이 동부전선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부전선에서의 집중적인 공격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패튼의 부상병 폭행으로 인한 문책성 인사로 강등되면서, 참모였던 브래들리는 서부전선을 맡았다. 그는 아이젠하워와도 같은 육사출신이었기에 우대를 받았다. 하지만 야전경험이 부족한 그는 너무 낙관주의에 빠져버렸다. 이 시점에 독일 기갑부대의 반격이 있었다. 

 

지상최대의 작전 : The Longest Day

 마켓가든작전은 몽고메리 장군이 만든 가장 허망한 작전이었다. 공수부대를 대거 투입해서 간곳이 하필 SS기갑사단의 휴식처였다니...   마켓가든 작전은 공수부터의 마켓작전과, 육군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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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반격

   벌지전투는 안트베르펜을 점령하여 연합군의 보급을 차단하겠다는 히틀러의 야심에 의해서 추진된 작전이었으며, 

그리프작전

   슈코르체니는 독일계 미국인을 활용, 전화선 차단, 요인암살,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켰다. 아이젠하워 암살계획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의 발을 묶었다. 

바스토뉴전투

   요아임 파이터는 화염방사대대로 사람들을 건물들과 함께 불태웠으며, 뫼즈강으로 달리던 말메디에서 미군 포로 125명을 모두 처형했다. 무장친위대가 아르덴에 도달하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제 5기갑군은 바스토뉴을 공격하였다.

   방어를 맡은 맬컬리프 장군은 미군이 바스토뉴 사수에 목숨을 걸고 마지막 통첩을 받았을 때, Nuts라고 답을 하였다. 기적적으로 날이 맑아지면서 연합군의 공습이 가능해지면서 기갑사단 공격, 보급선 공격등이 가능해졌다.

히틀러암살미수

   슈타우펜베르크는 폭탄을 배달했지만, 테이블과 테이블다리가 강력해서히틀러가 목숨을 건졌다. 이어 200여명의 정적적을 숙청하고 비밀리에 독수리요새로 히틀러는 나머지 장군들을 모두 이동시켰다. 

바스토뉴에서의 후퇴

   바스토뉴에서 400명의 기동부대(task force)가 기갑부대의 발을 묶을 폭탄들을 설치하자 무장친위대는 탱크를 모두 버리고 후퇴를 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의 패튼의 긴급지원 요청

   20만명의 병력을 끌고 바스토뉴 아군의 봉쇄를 구하기 위해서 2일동안 120마일을 주파했다. 패튼은 엄청난 셔먼 탱크를 활용했다. 개별 장비의 능력에는 독일제에 밀리지만 숫자적으로는 우위에 있었다. 

   파이퍼의 병력역시 가장 깊숙이 전진했지만, 차량을 불태우고 도보로 후퇴를 했다. 

최정예부대를 동부에서 빼낸 바람에 소련군의 진격도 빨라졌고, 아르덴에서의 손실도 엄청났다 결과적으로 최후의 최정예부대를 모두 소진했다. 

 

(실화) 패튼 대전차 군단 : Patten (1970)

 패튼의 전기를 배달의 기수편으로 편집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사실 영화 이름은 패튼 대전자 군단이나 .... 눈이 부신 전차전은 별로 없다.  영화의 시작이 연설로 시작했기에... 황당했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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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튼은 결국 투입이 된다. 

나의 의견

   아르덴숲을 탈환하고자 독일군은 대량의 탱크들을 모두 모아서 집결시킨다. 그리고는 날씨가 흐린날 연합군의 공군력이 완전히 시야가 막혔을때, 기습작전을 통해서 쳐들어갔다. 

   연합군도 지치기도 했고 독일군을 이기리라 낙관론이 무르익었을 때 독일이 벌지전투를 벌리면서 역습에 나선다. 하지만 승기는 이미 연합군으로 기울었다. 현명한 합의를 했었어야 하는데...  아쉬운 독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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