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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방벽

   41년 말 히틀러의 방어선은 곧 요새로 바뀌었다. 즉 마지노선을 흉내낸 것이다. Atlantic Wall로 명하였다. 물론 그 중간에 프랑스의 디에프 항구를 점령하고 방어해보기도 하였지만 6000명이 상륙했지만, 900명의 캐나다군이 사망하고 2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문제는 독일 첩보부가 상륙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었다. 

   이 순간 미군은 일본과 과탈카날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고, 1943년에는 독일은 소련과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 시점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대서양쪽에 새로운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처칠에게 설득했다. 

   1944년에 처칠은 동의를 했다. 미군과 영국군이 동시에 가서 패배를 하면 소련이 독일과 평화협정으로 모든 이익을 취할 것이 두려웠고,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돌진을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의 연합군 진격은 지지부진해진 상태였다. 

오버로드작전

   결국 연합군은 대규모 공세를 위한 Overload작전을 승인한다.

   1944년 봄 나치는 대서양 방벽 어딘가에서 영국이 공격을 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연합군이 파드칼레 어딘가에 상륙을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대서양 방벽을 아프리카의 사막의 여우 에르빌 롬멜에게 맡겼다. 롬멜은 대서양 방벽을 진단을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 만큼 대서양 방벽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더 강화를 하였다. 하지만 롬멜을 결정적인 날 날씨가 흐린 것을 틈타서 아내의 생일을 위해 작전지역에서 벗어난다.

   여기에서 밴드오브브라더스의 역사가 시작된다.

 

밴드오브브라더스(유럽) 1화~2화: The Band of Brothers

 2001년 방영시점에 밴드오브브라더스를 봤을 때, 그 사실적인 묘사에 감동적으로 봤었다. 역사적 스토리도 잘 모르고 그냥 노르망디를 그렸다는 것 외에 그저 3D와 실사의 합성과 영화적 효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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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의 반격준비

   연합군은 완전한 공중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연합군은 항공촬영을 하고, 소형잠수정으로 해변의 모래를 채취해 분석하기도 하였다. 퍼시 호바트라는 영국 개발자는 화염방사탱크나 수륙양용탱크 같은 것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비밀리에 해협해저에 송유관을 설치하고 거대한 조립식 항구도 개발하였다. 1200전투함, 40000상륙정, 3000대 탱크, 6500대의 함대가 항구를 출발했고, 200만 연합군이 프랑스로 향했다. 그것도 12000대의 공군기의 지원을 받았다. 아이젠하워 장군이 결국 육해공군을 통솔할 합동참모본부사령관이 되었다.

   우선은 북프랑스의 레이더기지를 폭파하고, 운하, 재보급기지, 연료창고등을 모두 폭발시켰다. 파드칼레로 가는 패튼장군이 이끄는 가짜 부대였다. 그리고 이런 정보를 이중첩자들을 통해서 정보를 확산시켰다. 

   우선 8000명의 영국 공수부대와 13000명의 미군 공수부대가 상륙작전전에 나치점령지에 투하되었다. 구름덕분에 착륙지점을 놓쳤고, 독일은 들판을 침수시켰었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가장 핵심지역인 페가수스 다리로 집결이 가능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날 Caen(캉)을 점령하기로 했다.  

   한편 칼레에서는 window라고 불리는 은박지들이었고 이는 함대처럼 보이기 만드는 속임수였다. Rupert라고 불리는 가짜 공수부대였다. 

   첫날 16만명정도가 캉을 향해서 진격했다. 

독일의 반격

   독일군의 유켄트는 죽을때까지 싸우는 부대였다. 리지외로 공수부대를 저지하러 21사단이 분리되었다. 하지만 그곳에 루퍼트만이 있었다. 

굳우드작전 + 코브라 작전

   굳우드 작전으로 이름붙여진 전차전을 시작으로 코브라 작전으로 폭격기가 독일군을 공격하였다.  

10만명의 독일군에 팔레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연합군은 승리했다.

나의 의견

   완전 방어를 하고 기다렸던 독일군은 연합군의 기만작전에 완전히 속았고, 그로 인해서 병력이 분산되고 지휘관이 유고인 상태에서 최대한 연합군을 저지했지만 결국 망했다.

   지휘관의 부재는 사기를 좌지우지하고 결국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던 독일군은 연합군에게 상륙을 허용하고 만다. 사실 연합군의 입장에서도 엄청난 물량을 투여하지 않고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도 했다. 만약 졌다면 지금 우리가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은 독일제국이라고 불리는 곳이 되어 러시아영토 만큼이나 큰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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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소불가침 조약에 의해서 소련의 묵인아래 무너져가는 민주주의 국가들을 지켜보던, 스탈린은 그 결과가 결코 서부, 중부유럽에 한정지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챈다.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독일과 소련은 전쟁을 시작한다. 독일은 동유럽의 철강과 유전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련과 전쟁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도 전격전의 교본처럼 

   공중전

   탱크

   포병

   보병

이런 순으로 진행하였다.   

   4-6주면 끝날 전쟁이 모스크바에서 진격이 끝이 났다. 유전지역을 얻어야 하는 독일군으로서는 스탈린그라드를 좋은 먹이감으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이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졌고, 총한자루도 없이 앞서 죽은 동지의 총을 손에 쥐고 달려가는 병사들이 소련의 병사들이었다. 

 

[실화] 세이빙 레닌그라드 : saving leningrad

 피난통에 그려지는 인간군상들의 생각과 행동들이 드러나는 그런 영화다. 아들을 살리려 피난선에 태우는 대위, 사람도 싣기 힘든 피난선에 피아노를 싣는 인사, 권력을 이용해 자동차를 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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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반격 11월 19일 

   100만의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추위에 지친 나치군에 강력한 반격을 9월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마스키로프카(천왕성 작전)이 완전히 먹혔다.  

   제 6군의 측면이 뚫렸다. 대부분 독일군이 아닌 연맹군들이었다. 루마니아, 이탈리아 등에서 차출된 군인이었다는 점이며, 독일군의 전격적을 모방해서 치고 들어갔다. 4일만에 칼라치 부근에서 조인하고 나서는 독일군 병력을 둘러쌓았다. 모든 작전이 야간에 이루어졌고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 작전속에서 첫 기갑군, 신형전투기를 도입했다. 완전히 재무장을 했다. 야크전투기를 몰았다. 

독일군 장교 파울루스의 충성

   히틀러의 명령은 지켜라였다. 파울로스는 좋은 참모이고 충성가 이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겨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주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30만 독일군이 필요로하는 보급은 괴링의 공군이 해내지 못했다. 러시아 공군은 공중봉쇄를 실시하였다. 

   겨울폭풍작전을 위해서 남쪽에서 치고 올라왔다. 발터 폰 자이틀리스는 떠나자고 했지만... 파울루스는 따르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잃은 것인 셈이다. 

   원수로 진급이 되었던 파울루스는 추이코프(주코프)에게 항복을 했다. 포로로 생존한 91,000명중, 5000명 정도가 살아서 돌아왔다. 

   반면 러시아군도 100만명 가까이 죽었다. 

나의 해석

   이 전쟁은 그야말로 1차 세계대전에서의 참호전 만큼이나 참혹은 양국가의 교차상태에서 벌어진 참극이었다. 소모전이었고 시민들을 상대로 벌어진 야만적인 전쟁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을 치르고 독일군은 시간이 흘러 겨울을 맞이 했고, 병참이 길어지면서 보급이 부족해졌고, 공군력이 강했지만 서부전선의 문제점도 지속되었기에 독일군은 결국 항복하였다.  게다가 이제는 소련군이 기만전술로 모든 현대식 무기를 스탈린그라드 주변으로 밀집시켰고, 한방에 양쪽에서 몰아가는 천왕성 작전을 시행하였다.

   이 결과로 2차 대전의 승기는 소련으로 넘어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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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제독의 교체

   진주만의 책임을 지고 허즈번드 킴멜 제독은 사임을 한다. 

 

허즈번드 킴멜 - 나무위키

Husband Edward Kimmel 전간기 및 태평양전쟁 초창기 미 해군의 제독. 진주만 공습 당시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서 그 책임으로 끝내 불명예스럽게 군복을 벗은 걸로 유명하다. 출생 : 1882년 2월 26일,

namu.wiki

   그 뒤를 이어 체스터 W 니미츠가 부임했다. 

   이어 일본에 무언가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다. 미국은 잠수함 참모인 프랜시스 로우대령이 제안한 육군폭격기를 항공모함에 싣고 동경 폭격을 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된다. 결국 폭격기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안된 항공모함에 두리틀 특공대를 싣고 동경근해에서 미국은 동경폭격에 성공했다. 하지만 폭탄중에 몇개가 황궁 주변에 떨어졌었고, 이에 대한 국민적 분노 때문에 일본은 즉각 보복에 나섰다.

 

[9][실화적] 미드웨이 2019

 영화 미드웨이(2019)는 미드웨이 해전을 역사적으로 실화한 영화이다. 승전국인 미군의 입장에서 감청으로 얻어낸 고급정보를 기준으로 일대 도박을 한 니미츠 장군 그리고 그의 지휘아래 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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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이소루쿠 제독은 항공모함을 동원

   야마모토는 니미츠 함대의 항공모함을 전멸시키기 위해서 미드웨이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미드웨이는 급유기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연합군 소유의 기니에 있던 포트모르즈비 공격을 지원하던 일본군 항공모함 2척이 미국의 항공모함인 렉시턴과 요크타운호을 발견한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 2척도 손상을 입었지만, 렉시턴호 완파되었고, 요크타운호도 침몰직전의 위기에 닥친다.  

미드웨이 해전

    나구모 주이치의 지휘하에 미드웨이를 점령할 것을 명령받았다. 문제는 나구모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기밀유지와 기습에 의존하는 일본군의 작전은 하와이의 암호해독팀의 하이포팀의 로슈포트가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을 해낸다.  

   그는 언어가 아니라 의미를 해독하려고 노력했었다. 20%수준만 해독이 가능했었고, AF로 명명된 목표물에 대한 의미를 유추해냈었다. 하지만 위싱턴은 무시했다. 

   June 4, 미드웨이에 일본군은 항공모함 4대와 해군 함재기들이 일제히 발진했다. 하지만 섬에 폭격기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의심을 품었다. 

   미군의 폭격기들은 일본군 항공모함 바로 위에 나타났다. B-17고고도 폭격기들이 동원되었지만, 제로센에 표적이 되었고 일본항모에 아무런 손실을 주지 못했다.

   3개월~6개월이 걸리는 USS요크타운이 3일만에 진주만에서 수리를 마치고 나타났고, 지상공격을 준비하던 공격기는 모두 어뢰공격으로 준비를 전환시켜야 했다. 

   포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급유중인 비행기들이 대기중인 혼란상황(helter skelter)에서 미군은 전투기가 없는 어뢰를 장착한 뇌격기들 뿐이었다. 게다가 10%의 성공률을 갖는 어뢰들 뿐이었다.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엉뚱한 곳에 가있었다. 게다가 여기서 밀리면 더 이상의 재건의 기회가 없었다.

우연한 기회

    우연히 미군 급강하폭격기 대대장은 수평선에 거대한 무지개를 봤고, 일본군 구축함이 혼자 있었던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바다에 빠져 죽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구축함을 쫓았고, 그 끝에 항공모함을 발견하였다. 그 상황에서 USS요크타운에서 발진한 공격기 대대가 일본군을 두방향에서 서로다른 고도로 접근했었다. 하지만 전투기들이 멀리퍼져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방해하지 못했으며, 레이다가 없었기에 완전 공격을 허용했다. 

   5분만에 일본항공모함 3척을 폭격하는 데 성공했다. 

나의 해석

   진주만으로 위신이 땅에 떨어진 미국은 수리를 마친 항모를 잘 활용해서 최대한 가까이 일본근해로 가서 동경폭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사실 일본의 진주만 폭격도 사실상 사전 선전포고가 없는 테러와 같았고, 미국의 동경 공습도 일본의 그림에는 없는 테러였다. 결국 테러를 주고 받은 두 국가는 교전상태로 빠진다. 

   미국은 결국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유럽에서의 전쟁물자 지원과, 일본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복잡한 전쟁이 말려들고 말았다. 

   당시 일본은 세계 최고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는 해군, 육군 모두 최고의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구모의 현장경험없는 지휘는 미군 항공기의 기습에 여지없이 대파당하면서 해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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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전쟁의 신을 불러냈다. 독일제국은 빠른 기동력, 라디오 기술을 이용한 전차기술, 초인적인 보병의 능력은 전쟁의 초반을 완전히 혼란으로 빠뜨렸다.

독일은 영토를 잃은 문제

   베르샤유조약의 여파로 엄청난 배상금은 차치하고라도 독일 영토의 동쪽은 폴란드와 체코에 양도하고, 라인란트 지역은 벨기에와 프랑스에 대한 비무장지대의 역할로 양도를 했다. 

   다른 나라들도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국민들 내부에 있었다. 아우토반 만들기나 하는 식으로 일자리를 창출했다. 

   1935년 의무병역제도를 시행하고, 30000명을 동원하여 라인란트 지역을 회복하였다. 1938년엔 오스트리아로 진격을 했다. 

   연합국들은 강제점령이라 보지 않고 오스트리와와의 통합을 바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 사용하는 수데테란트 지방의 합병을 승인하고 불가침을 지지하는 뮌헨협정을 이끌었다. 영국수상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이루었다. 

   서방국가의 대응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진격하고 있었다. 즉 독일 영토의 확장. 결국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소련은 1차 세계대전으로 잃은 소련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폴란드의 침공과 영국, 프랑스의 선전포고

   프랑스의 마지노선에 있는 방어책은 연합군이 선제공격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다른 장군들은 예전 1차 대전과 같은 방법으로 북프랑스를 공격하라고 했지만, 프로이센 출신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성공계획을 제시했다. 반면 히틀러는 장기적으로 갈 수 있는 프랑스 공격에 앞서 자원확보를 위해 북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침공을 계획했다. 영국군이 노르웨이에 상륙하여 저지를 해보려했으나, 기갑부대와 공군력으로 순식간에 전세는 독일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5][실화] 2차 세계대전 폴란드군 : 베스테르플라쯔(1939 Battle of Westerplatte)

Director: Pawel Chochlew Writer: Pawel Chochlew Stars: Michal Zebrowski, Robert Zoledziewski, Jan Englert 1939 Battle of Westerplatte (2013) - IMDb Directed by Pawel Chochlew. With Michal Zeb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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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와 네델란드 침공

   독일은 벨기에와 네델란드를 참공한다. 우선 공수부대가 다리를 확보하였고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었다. 영국침공을 위한 항구확보를 목적으로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델란드를 침공하고 있다는 소식은 연합군의 최정예를 벨기에 상륙을 하게 만들었다. 

아르덴으로의 독일군 진격

   아르덴으로 들어간 군인들이 벨기에에 있는 영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전략이었다. 시간, 속도, 대담함(time, speed, daring)은 독일군의 핵심전략이었다. 

   이를 설계한 사람은 하인리히 구데리안 장군이었고, 신기술과 독일군의 전통적인 전술을 결합하여 압도적인 전력으로 전격전을 지시하였다. 그는 공군을 공중포병처럼 사용, 라디오 기술을 전차, 트럭, 자주포에 활용하는 등 신기술을 자유자제로 활용하였다.

   퍼버틴이라는 피로회복제가 3일 밤낮을 달리게 했었다. 

됭케르크 철수작전 

   벨기에, 네델란드에 원정군인 영국군은 칼레에서 영국해협을 건너서 후퇴를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하지만 칼레도 빼앗겼다. 하지만 칼레에서의 영국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 시간을 벌었고, 뒹케르크에서의 방어선이 완성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 갑자기 진격중지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장군들이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도 마음대로 진격을 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나치 인사들도 도배된 공군에게 승전의 영광을 주어야 한다고 육군의 진격을 정지시킨 헤르만 괴링의 의견 때문이었다. 육군은 병력손실을 발생시키니 그런 위험이 없는 공군이 담당할 수 있도록 히틀러를 설득한 것이다. 

   하지만 구름이  많아썬 대다가 독일군이 정유소를 폭파하는 바람에 4.5Km에 달하는 visibility가 문제가 되면서 슈투카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공군의 스핏파이어와 헤리케인이 출력하면서 급강하폭격기를 격추하기 시작했다. 

   45000명을 예상했던 구조가 340,000만명을 구조에 성공했다. 

프랑스 정부의 파리 남부로의 철수

   프랑스인들은 투르, 보르도로 피신했다. 레노 총리는 사임을 하고 페탱 원수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비시정권을 수립되었다. 

나의 해석

   전격전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렬로 서서 사격을 하고 전진을 하고 또 사격을 하고 전진하고 기마병이 와서 우회로 기습공격을 하는 그런 전쟁의 모습에서 ...

   3박 4일을 쉬지 않고 달리면서, 마치 KTX와 같은 속도로 돌격하는 전투병과 탱크를 보면 기갑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선전포고도 없이 혹은 형식적으로 하고, 기갑사단이 그간 다닐 수 없는 길을 뚫고 습격을 한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최초 징키스칸의 부대가 2주는 넘게 걸릴 것이라는 거리를 단 1-2일 만에 돌격해서 주파를 해버리는 순간 유럽의 병사들이 기겁을 했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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